감싸기. 그 온유한 속성을 단단한 소재들에서 찾아내다

- 조각가 유재흥 작가

조각에서 청동은 차갑고 돌은 온건하며, 나무는 곧음을 표현하는 재질이었으나, 제작 기법이 발달하면서 재료의 물성이 가진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예컨대 차가운 재료에서 인간적인 감성을 찾거나, 무미건조한 소재로부터 온화한 주제를 전개하는 반전을 찾기 쉬워진 것이다. 일상적인 소재에서 감성의 현존, 그리고 근원까지 찾아내는 작품세계를 가진 유재흥 작가는 그 반전으로 물리적 3D를 넘어 내면의 회귀까지 감상의 영역을 펼치게끔 한다.

본연의 물성을 버리자 나무는 천이 되어 돌을 감싸 안았다

유재흥 작가는 돌과 나무를 주테마로 작업해 오고 있다. 본래 공학도를 꿈꾸었지만 브론즈로 3차원의 공간영역을 표현하는 김영원 작가의 <중력 무중력> 시리즈에서 깊은 감명을 받고 군 제대 후 미술을 전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때로 볼 수 있는 반복적인 배치와 단순한 질감의 극사실적인 표현은 역학적 계산과 감수성이 어우러져 나온 것인데, 이는 돌과 나무를 대하는 시각에서도 역발상을 이루게 된다. 살아서는 가지를 뻗어 곡선을 이루는 나무는 베어지면 단단한 판형이나 덩어리로 남을 뿐이지만, 유 작가의 손에 의해 디테일하게 깎여 나가 돌을 감싸는 보자기 형태를 갖게 되었다. “15년 간 나무로 작업해 오고 있다. ‘감싼다’는 것은 작품의 키포인트다. 나무의 물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많은데, 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나무로 천이라는 소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유 작가는 설명한다. 또한 유 작가는 조각의 다른 속성인 ’연마‘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나무를 수작업으로 연마한다는 것은 작가 자신을 채찍질한다는 것과 같다. 그러한 작업방식은 모친의 상을 치르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은 천으로 감싸며 배냇저고리에서 시작되고 삼베 수의로 끝나게 된다는 철학적 깨달음으로부터 시작 되었다. 천에서 보자기에 천착하는 것은 동양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다. 안고 받치는 공통점으로 어머니의 포근한 정서가 담긴 보자기는 손수건에서 장식, 더 나아가 가방의 역할까지 하여 외국에서는 흔치 않은 소재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감싸기>, <보고서> 연작에서 나무는 결이 살아 있는 채로 돌을 온건히 품은 보자기가 되어, 이를 올려다보는 관객에게 작가의 정성마저 감싸서 전하는 듯 잔잔한 음영으로 미소 짓는다. 첫 개인전부터 돌을 감싸는 나무 작업을 진행했으며, 유 작가는 그런 일상성에서 반전을 꾀하기 시작했다. 전시회를 할 때 다른 작가들이 그림을 노란 종이에 싸 오는 것을 보고, 나무를 깎아 소포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저 그림을 감싼 종이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반전은 MDF합판을 이용한 2008년 작 <One Month>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진짜 테이프로 붙여 봉한 이 작품이 왜 나열되었는지, 마치 평범한 서류봉투처럼 보이는 종이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사실 종이인 척 하는 나무에 있었던 셈이다.

대조되는 속성을 통한 유사성으로의 전이, 그리고 규모의 확장

유 작가의 작품들은 상반된 사물이 주는 긴장감을 부드러움으로 이완시킨다. 단단한 본성에서 얇고 부드러운 촉감을 상상하게끔 하는 작법은 <보고서>의 다른 버전에서도 볼 수 있다. 아무 가공도 거치지 않은 자연석은 마치 천과 같이 정교하게 깎여 나간 대리석 위에 놓여있기도 하고, 감싸져 매듭 속에 은닉되기도 한다. 이러한 은닉의 반전은 ‘숨겨진 소재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켜 오히려 더 강조하는’ 속성에서 더욱 효력을 발한다. 미니멀 아트에 입체감을 더한 <늘리기>에서 일상 속의 비일상성을 보여주었다면, 반복과 양감에 시공을 초월한 입체감을 부여한 <부드러움에 대한 진술>은 일상 속에서 다채로운 질감을 눈으로 체험하게 한다. 이 겹겹이 쌓인 양감은 카펫과 태피스트리가 가진 두터운 우아함과 파티시에의 데코레이션 크림처럼 개개인이 각각 다르게 지닌 부드러움에 대한 기억을 반추하게 하는 것이다. 8회에 걸친 개인전마다 ‘언제나 유사성 속에서 변화를 추구했다’고 고백하는 작가의 성향은 공통적 속성에서 징검다리를 건너듯 이전하곤 한다. 그래서 <Wrapping> 시리즈에서는 반복적인 팝아트와, 옛 여인들이 출산 때마다 광목을 엮어 매달던 명주천과 탯줄을 동시에 떠올릴 수 있다. 따라서 ‘감싸기’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로 자연스레 연결되고, 떨어짐과 흘러내림을 표현하는 작업과정인 ‘드리핑(dripping)'을 병행하기에 이르렀다. 순간을 영원으로 포착하되 영혼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조각가의 권능이요 특권이다. 그래서 순간적인 이미지를 표현하며 동적인 작업을 진행한다는 관점으로, 작품을 통해 누군가에게 끊임없는 화두를 던지게 될 것이다. 반복적인 요소, 감쌈과 묶음, 뒤틀림은 일종의 표현 한계를 깨고 나와, 드리핑 작업에서는 공간과 작업의 연계를 본격적으로 이루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미 플라스틱 재료를 도색하는 작품을 통해 공기를 담은 고무풍선의 풍만한 광택을 재현한 적이 있는데, 그러한 자유로운 작업 속에서도 200회가 넘는 단체전과 초대전에서 제한된 공간에 작품을 펼쳐 놓는 형식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다고 한다. 더욱 다양한 장소에서 도전하고자 하는 유 작가는 언젠가는 1층에서 꼭대기까지 이어지는 대형 프로젝트와 야외조각 형식의 설치미술을 시도할 계획임을 밝혔다. 해외 설치미술 중 홍콩에서 화제가 된 호프만의 러버덕은 풍선의 바람이 빠지는 과정에서 인간의 생로병사를 떠올리게 했고, ’크리스토christo‘의 빅 에어 패키지는 규모보다는 그 광대한 범위를 감싸고 뒤덮는 성향 때문에 더욱 유명했다. 앞으로도 유 작가가 흐름과 떨어짐이라는 표현수단으로 단단한 물성의 반전을 어떻게 승화시킬지 주목해 본다.